비밀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폴 트루니에(Paul Tournier)는 ‘비밀’이라는 삶의 한 양식을 가지고 성숙을 설명한다. 성숙하지 않은 사람은 비밀을 다룰 수도 간직할 수 없다. 그래서 미성숙한 아이들은 비밀이 없다는 것이다.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아이들은 비밀이라는 자기만의 보물을 간직할 수 있는 독립된 심리적인 공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는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다짐에 다짐을 받아 두어도 하루가 채 가기도 전에 퍼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같이 사는 부모님과 가족들이 모르는 자기만의 세상을 간직하며 살게 된다. 어려서는 미주알 고주알 중요하지도 않는 것까지 묻지도 않아도 말해주더니 청소년이 된 후로는 부모와 가족에게 공유하지 않는 자기 만의 보물들을 쌓아 두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자아가 형성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다가 더 성숙해지면 자신만의 비밀을 나눌 친구나 연인을 찾게 된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비밀을 나누었다는 것은 그 상대에게 ‘친밀감’을 느꼈다는 의미이다. 비밀의 공유는 신뢰와 친밀감의 공유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비밀이 없는 사람이 없듯이 하나님도 비밀을 가지고 계신다. 에베소서라고 하는 바울서신은 바로 ‘하나님의 비밀’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하나님도 아무나 자신의 비밀을 나누지 않으셨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있다. 이 사람은 소위 ‘믿음의 조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비밀을 공유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애굽기에는 ‘율법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모세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거기에도 이런 표현이 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 32:11)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당신의 비밀을 나누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스라엘에서 역사상 최고의 왕으로 추앙하는 인물이 있다. 다윗이다. 유대인들이 다윗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이스라엘의 국기(national flag)에 ‘다윗의 별’을 박아 버렸다. 그런데 다윗은 유대인들만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도 좋아하셨다. 얼마나 좋아하셨으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런 별명을 붙여 주셨다.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별명 말이다. 이런 다윗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비밀을 나누셨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친구들에게 나누셨다는 비밀의 정체는 무엇일까? 예수님도 열 두 제자를 뽑고 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한복음 15장 15절)

하나님이 친구에게 나누셨다는 비밀은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Christ)란 ‘기름부음은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이다. 히브리어 ‘메시아’와 의미가 똑같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구세주’요 ‘왕’이라는 진실이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간직하셨던 비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니까 이 글을 읽고 맥이 빠지는 독자도 있으리라. 이제는 너무나 흔한(?) 이름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번 뒤집어 생각을 해 보자.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니까 말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친구가 되었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요즘 필자는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님을 묵상하며 행복에 빠졌다. 함께 그 행복에 빠질 수 있도록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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