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도 사람처럼 눈물을 흘릴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사람들은 많다. 악어의 눈물이라는 서양 속담처럼 감정은 없어도 우는 것처럼 보이는 짐승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낙타의 눈물은 소의 눈물과 악어의 눈물과 다른 감동적인 스토리가 있다.
낙타는 사막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특별한 생명 장치를 지니고 있는 짐승이다. 등에 물주머니의 구실을 하는 혹이 있다거나 모래바람을 막는 긴 눈썹이 있다거나 하는 모습만이 아니라 성격이 매우 특이하다. 낙타는 새끼를 낳아놓고서도 간혹 돌보지 않는 모성애 없는 이기적인 낙타들이 있다. 새끼가 굶주려 죽게 생겼는데도 젖은 물론이고 가까이 오면 발로 차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어미에게 버림받은 새끼 낙타는 불쌍하게도 죽고 만다. 죽일 것 같이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는 사막의 환경에서 살다 보면 그렇게 비정한 낙타들이 생겨난다고 한다. 이럴 때 몽골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런 매정한 어미를 다스리는 독특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주 놀랍게도 그 어미 낙타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악기로 마두금이라는 현악기가 있는데, 그것을 특별히 잘 연주하는 악사를 먼 데까지 가서 초대해 온다. 그리고는 낙타를 앞에 놓고 마을 사람이 모여 연주회를 연다. 마두금 연주에 맟춰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인 할머니, 자식 손자를 많이 키워본 그런 할머니가 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자장가와 같이 다정다감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구슬픈 사랑의 노래를 말이다.
그러면 마두금 연주와 할머니의 구슬픈 가락을 듣고 낙타의 눈에서는 눈물방울이 흘러내린다. 그렇게 눈물을 흘린 낙타는 모성애를 되찾아 제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정을 들여 잘 키우게 된다.
감동의 눈물은 비정한 낙타의 모성애만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가슴 깊이 흐르고 있는 영성의 뜨거운 수맥을 마중물과 같이 퍼 올린다. 메마르고 강퍅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없다.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영성이 깨어날 수 없다. 감동의 눈물만이 내면의 율법을 깨트리고 어린아이의 순수한 영성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최근에 한국에서 오신 여자 태권도 사범님이 우리 교회를 다닌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교회를 다닌 적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만 오면 눈물이 난다고 한다. 예배가 시작된 것도 아닌데 예배당에 들어와 앉아만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물었다. “집안에 좋지 못한 일이 있으신가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집안에 안 좋은 일도 없고 개인적으로 힘든 일도 없는데 이상하게 교회에 가면 눈물이 나 당혹스럽다는 것이다. 더 신기한 것은 자신이 왜 눈물이 나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야기해 주었다. 그것은 감성의 눈물이 아니라 영성의 눈물이라고… 그동안 몰랐던 영의 아버지를 만나 내 안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았던 영혼이 흘리는 눈물이라고.
교회를 다니든지 다니지 않든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알든지 모르든지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는 하나님과 교감할 수 있는 영성이 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아직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영성이 터치를 받지 못해 깨어나지 못했을 뿐 영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때 그 사람안에서 잠자고 있던 영성을 깨우는 것은 바로 감동의 눈물이다. 성령님이 임재하실 때 감동의 눈물은 마중물이 되어 영성의 지하수를 밖으로 분출하게 한다. 영혼의 눈물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날 때가 된 것이다. 필자도 늘 이 영혼의 눈물이 마르지 않기를 기도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