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있는 인도 우화가 하나 있다. 옛날에 한 마리 쥐가 살고 있었는데 고양이가 무서워서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 쥐를 고양이로 만들어 주셨다. 그런데 또 고양이는 개가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 고양이를 개로 만들어 주셨다. 그런데 또 그 개는 호랑이가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 개를 호랑이로 만들어 주셨다. 그런데 그 호랑이가 사냥꾼이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래도 너는 쥐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고양이로 만들어 주건 호랑이로 만들어 주건 쥐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사실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외형적인 조건을 변화시키면 우리 삶 속에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펼쳐질 것 같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겉모양을 바꾸어 놓아도 그 마음에 쥐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쥐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마음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우리가 바라는 행복도 느낄 수 없고 관계의 열매도 맺을 수 없다.
최근에 친구가 육아와 살림을 도맡게 되었다고 한다. 평생 살림이나 육아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것을 하게 되었으니 죽을 맛이란다. 잘하지도 못하고 서툰 것을 하자니 잘 되지도 않고 마음 속에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더니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자가 이런 것이나 하고 있다니 생각하며 초라하다는 마음이 밀려온 것이다.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현실에 대해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쓴 뿌리가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17세기, 파리 갈멜 수도원에서 평생 주방에서 일을 하며 산 로렌스 형제의 글이 친구의 마음에 부딪쳐 오기 시작했다.
“나는 후라이팬의 작은 계란 하나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는다. 그 일도 다 끝나 더 할 일이 없으면 나는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한다… 로렌스 형제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수단은 매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자신의 본능적 성향과 어긋나는 것이면 어긋날수록 그 일을 주님께 드리는 자신의 사랑의 가치는 그만큼 커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또한 사소한 일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드릴 가치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뭔가 부족하여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시며, 또한 우리가 행하는 일들을 보실 때 오직 거기 담겨지는 사랑만을 보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친구는 로렌스 형제가 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수도원 주방 일과 노동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섬기는 마음으로 행복하고 기쁘게 해냈을 뿐 아니라 다른 시간들 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깊은 회개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무엇을 하느냐? 보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느냐?를 보신다는 것을 깨닫고 육아와 살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람들이 칭찬해 주고 박수를 쳐 주면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인 것이고 언제나 사람들은 나에게 칭찬과 박수를 쳐주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의미는 보잘 것 없는 일을 하더라도 그 시간 가운데 하나님을 초청하고 하나님이 중심이 될 때 찾아오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하나님이 자신의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